조선시대의 풍수지리의 위상을 살펴보면 고려의 마지막 왕이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의 시작과 함께 여러 제도를 통해 국가의 변모를 시도했고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가운데 풍수지리에 입각한 새로운 도읍(都邑)을 선정코자 했다. 이에 권중화를 시켜 전국의 명산대천을 살핀 결과 계룡산의 신도읍지와 진산에 태실(胎室)을 설치하기로 했다. 곧바로 이성계는 무학 대사를 대동하고 자문을 구한 뒤 신도안의 입지를 살피고 공사를 착공했다. 하지만 개성에 도읍을 두자는 기득권 세력과 이방원을 추종하는 신흥 세력인 하륜 등의 건의에 의해 1년 만에 공사는 중단됐고 고려시대 남경(南京·지금의 광역시)이었던 한양으로 천도하게 됐다. 한양은 풍수지리의 오행론(五行論·목, 화, 토, 금, 수)과 조선 왕조의 지배이념인 유교사상을 적용해 풍수적 지세를 갖추고 궁터와 4대문의 위치와 명칭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비보풍수를 적용했다. 또 경복궁의 좌향(座向)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당시 국사(國師)였던 불교의 대표 주자인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개국에 가장 큰 공헌을 새우고 제2인자로서 집권세력을 대표하는 유학자인 정도전과의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무학대사는 주산(主山)의 위치를 인왕산으로 하고 청계천의 물을 얻을 수 있는 득수로 좌향을 정하자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에 반해 정도전은 유학의 사상에 의해 궁터를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그 아래 정남향의 좌향을 주장했다. 결국 유학파의 주장대로 정도전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조선시대 국정 철학이 유학에 있었으므로 불교는 현실 정치에서 물러났지만 풍수지리는 조선시대에도 전문 기술직으로 과거 시험을 통해 음양과(陰陽科)에 포함돼 인재를 등용했다. 음양과를 통해 선출된 이들로 궁궐 및 왕릉의 선정과 관리 등에 관한 실무를 담당하게 됐다. 하지만 불교와의 관계에서 발전한 풍수지리는 유학을 국학으로 표명한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조선 중기에 접어들어 파당정치와 임진왜란 등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사회적으로 동요가 일어날 시기에 광해군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이의신의 상소로 경기도 파주 지역인 교하(交河) 땅으로 천도(遷都)를 명했다. 이는 광해군이 흔들리는 입지를 다지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풍수지리설을 이용했지만 인조반정으로 인해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풍수를 맹종하는 주술적 개념으로 잘못 사용됐다. 그 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고 조선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신분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왕실과 집권세력에 대한 불만을 계기로 그동안 왕실과 귀족사회에서만 주로 이용되었던 풍수적 사고가 신분이 낮은 계층에까지 접근하게 됐다. 따라서 기회가 된다면 누구든 신분에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은 집터를 구하고 좋은 묘지 터를 구하면 후손이 발복해 관운과 재운을 얻어 신분상승과 부귀를 누릴 수 있다는 ‘터 잡기’ 망각으로 빠져들게 했다. 이처럼 풍수의 학문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변모됐으나 실의와 고통에 빠진 백성의 마음속에 남아 언젠가는 나에게도 희망이 올 수 있다는 주술적 형태로 변화됐다. 풍수지리가 민중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은 계기는 됐지만 학문적 관점에서는 원래의 의미가 변색돼 혼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지식층에 의해 서양문물과 학문의 영향을 받아서 사실에 입각해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인 실학(實學)사상이 나타나게 된다. 지리학에 있어서도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 등이 전통 지리적 사고와 실학의 영향을 입어 새롭게 편찬되고 제작됐다. 이 무렵 실학파의 학자들은 주술적 풍수와는 학문적으로 달리하게 됐고 풍수를 철저히 배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풍수지리가 우리 민족의 전통 지리적 학문과 철학 및 자연과학으로 계승 발전시키지 못했고 정신적 측면과 주술적 흐름을 이용한 왕실과 집권세력의 안위와 자기합리화의 방향으로 이용하는 등 터 잡기인 양택(陽宅)풍수와 묘지에 관한 음택(陰宅)풍수로 편협한 모습으로 전개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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