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북산의 호랑이를 죽임③

노고록의 동해바다에서 봤던 황금빛 보름달이 드륵의 강물에도 어리었다. 매섭게 몰아치던 바람도 완전히 누그러져 봄이 무르익었다. 대망새와 소리기는 첨벙첨벙 강을 건넜다. 대망새는 강물을 손으로 떠 입을 맞췄다. 그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진 모르지만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드넓은 벌판을 가로질러 북산쪽으로 곧장 가면 드륵이다. 대망새는 들판 중앙에 덩그러니 솟아있는 커다란 바위로 걸어갔다. 아버지 소낵의 영혼이 깃들었다는 바위무덤이다.

대망새는 바위무덤에 입을 맞춘 뒤 생각의 태엽을 빠르게 과거로 감았다. 북산의 호랑이, 아버지의 하얀 뼈들, 울부짖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호랑이가 아버지를 먹어치우고 있을 때 마치 저주에라도 걸린 것처럼 도무지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뻥뻥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자 또다시 야수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 으아아~ 으아아~~.”

소리기가 대망새를 말려봤자 소용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댕글라의 고다리에게 드륵이 잿더미가 되고 가족의 생사조차 모르는 상황이다. 아버지의 무덤을 붙잡고 하염없이 흐느끼던 대망새의 어깨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고개를 든 대망새의 얼굴에 비장함이 서려있다. “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네. 지금부터 우리는 팬주룽의 희망과 대의를 위해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을 해야 하네.”

소리기는 대망새의 생각에 무조건 동조한다는 듯 수더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들이 있던 곳으로 가까이 갈수록 대망새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짐작만할 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가족과 드륵 사람들의 생사였기 때문이다. 마을 어귀에 이르자 맬싹에서 봤던 도랑물이 작은 굽이를 만들어 ‘똘똘똘~’ 흘렀다. 대망새가 낯선 맬싹에서 느낀 것처럼 소리기도 드륵의 도랑을 보면서 고향 사람들과 아까비를 생각했다. 드륵의 도랑은 북산에서 내려오는 샘물이 흘러 만들어진 드륵 사람들의 생명수였다. 도랑을 따라 오르다 보니 청담한 우물이 보였다. 옛날 같으면 이 시간에도 어런더런 사람들로 북적대던 우물이었을 텐데 지금은 적막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집들이 있어야 할 곳에 집들이 없고 스산한 바람만이 귀신소리를 내며 드륵의 하늘을 휘감고 있었다. 대망새는 흉참한 바람소리가 고다리에게 죽은 드륵사람들의 원혼이 아닐까 생각했다. 밤이 점점 깊어갈수록 보름달도 환해져 드륵의 들판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앗!” 소리기가 갑자기 짧은 비명을 질렀다. 소리기가 가리킨 곳을 보니 가물가물 불빛이 보였다. 그 옛날 부족 사람들이 모여 갖가지 대소사를 치르던 장소, 부족장 모대기의 집이었다. 짐작하지도 못한 뜻밖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모대기의 집 외에 다른 집들은 이미 잿빛 들판에 함몰돼 버렸다. 마음 같아선 득달같이 달려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과거에 그 평화로웠던 드륵이 아니다. 대망새와 소리기는 두더지처럼 살금살금 기어 가까이 다가갔다. “과연 모대기의 집이다. 그런데 저, 저건….”

대망새의 눈꺼풀이 파닥파닥 떨렸다. 대망새가 본 것은 부족장 모대기였다. 모대기는 허리를 조금 굽힌 채 이리저리 걸어 다니고 있었다. 툭하면 매질을 당한 결과였다. 모대기 주변으론 꽤나 많은 드륵 사람들이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대부분 나이가 어리거나 늙은 사람들뿐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활과 화살, 창, 도끼, 칼 등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만들고 있었다. 이들은 동물사냥꾼답게 날렵하고 치밀한 솜씨로 무기를 척척 만들어냈다. 그들을 감시하는 댕글라 놈들 50여 명이 채근하는 채찍을 무작스럽게 휘둘러댔다. 상황 판단이 끝난 대망새가 놈들을 덮쳐 허리뼈를 부셔버리고 다리를 분질러버리겠다고 말했다. 전략을 짜고, 적들의 숫자를 따지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는 필연적 선택이었다.

“끼야호!” 대망새와 소리기는 미친 맹수처럼 돌진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놈들은 지옥문에서 저승사자라도 만난 듯 혼비백산했다. 그러나 상대가 두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고 다소 느긋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것은 놈들의 멍청한 생각이었다. 위대한 사냥꾼 소낵의 아들, 호랑이를 때려잡은 노고록 최고의 전사 대망새를 막아낼 놈이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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