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당은 빵을 팔지만 대전시민은 자부심을 산다

▶ 2014년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원하는 자리, 원하는 크기만큼 자리를 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성심당은 대전에 와야만 만날 수 있다’는 그 희소성도 성심당의 본질 가운데 하나.

▶ 6월항쟁 격변기에 시위대에게 빵을 나눠줬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기도….
2005년 화재, 다들 잿더미로 변한 성심당은 이제 끝났다고….
"위기 때마다 대전시민이 구해줬지요. 변함없는 애정으로 줄을 서 준 은인들…."

▶ 창업주는 그날 팔고 남은 빵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줬지만 선대의 뜻을 이어받은 임 대표는 아예 어려운 이웃과 나눌 빵을 따로 굽고 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가치를 아는 이 나눔의 미덕이 기적의 씨앗이 됐다.

▶ "대전에 제과·제빵 박물관 혹은 테마파크를 만들 겁니다. 일본 삿포로의 초콜릿박물관이나 체코 맥주산업관광 인프라 같은 지역 특색을 살린 문화관광 인프라 확대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NO.1 빵집 성심당이 구워낸 기적의 스토리]

성당의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대전 원도심에 잠시의 평온이 깃든다. 성당 맞은편 은행동의 한 귀퉁이,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동네빵집에선 갓 구운 구수한 빵 냄새가 향긋하게 피어오른다. 그 세월이 60년이다. 도시는 많이 변했지만 대흥동성당과 이 동네빵집은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원도심의 중심 추 역할을 하고 있다. 원도심은 이제 끝났다고 하지만 선뜻 장담할 순 없다. 이 동네빵집의 ‘미친 존재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밝은 빛을 발한다. 누가 만들어내든 ‘대한민국 3대 빵집’하면 꼭 빠지지 않는 이름 석자, 바로 성심당(聖心堂)이다.

 

#1. 비약

성심당의 나이는 올해 61세다. 1956년 대전역 앞 천막 노점에서 찐빵을 구워낸 게 시초다. 2년 뒤 목척교 인근 월세 점포에서 제과점으로 거듭났고 1967년 지금의 자리에서 ‘전설의 빵집’이 됐다. 

창업주(故 임길순, 1997년 작고 향년 88세)의 대를 이어 임영진(63) 현 대표가 구원투수로 등판해 튀김소보로(튀소)와 부추빵, 전국 최초의 제과점 포장빙수 등 수많은 히트상품을 만들어내면서 ‘100년 가업’의 기틀을 다졌다. 

튀소는 1980년 출시 후 약 4000만 개가 팔렸다. 행운도 따랐다. 웰빙 바람이 불면서 기름에 튀긴 튀소는 정크푸드 대접을 받기도 했지만 성심당은 정직하다는 신뢰가 튀소를 부활시켰다. 현재 성심당에선 400여 명이 일한다. 일반적으로 유명 빵집에 가면 빵 나오는 시간이 있는데 성심당에선 무의미하다. 나오는 족족 팔려 나가니 항상 신선한 빵이 준비된다.

 

 

“‘제빵왕 김탁구’라는 드라마가 흥행하면서 오랜 역사를 가진 제과점이 재조명을 받게 돼요. 이 과정에서 드라마와 성심당의 스토리가 닮았다고 해서 성심당이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 같아요. 역사와 전통의 가치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도 달라지면서 성심당이 전국적인 빵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성심당을 대전의 자부심으로 여겨주시는 대전시민의 사랑이 이 모든 것의 원천이죠. 지역민의 한결같은 믿음이 없었다면 지금의 성심당도 없었을 겁니다.”

성심당의 가치에 가장 먼저 눈을 뜬 건 롯데백화점이었다. 수입 유명 베이커리가 손들고 나간 자리를 대신할 브랜드로 성심당을 선택한 거다. 임 대표는 망설였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성심당 본점 시스템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2011년 12월의 일이에요. 그때 참 고민이 많았어요. 유명 베이커리도 못 버틴 곳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고민도 있었지만 ‘성심당이 다시 프랜차이즈 하는 거 아냐?’라는 소문이 돌까 그게 두려웠고 무엇보다 빵맛과 성심당이 지켜온 가치를 그대로 구현해줄 사람을 찾지 못했어요. 때마침 동고동락했던, 그래서 성심당의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전 공장장(박병선 씨)이 수락해줘서 대전 롯데백화점에 지점을 낼 수 있었죠.”

과연 성심당이 성공할 수 있을까? 우려는 컸지만 기우였다. 2000년 롯데백화점 대전점이 문을 연 이후 한 매장에서 고객이 길게 줄을 선 건 성심당이 처음이었다. 첫 날 매출이 직전 베이커리의 10배에 달했다. 이후 성심당은 2012년 11월 대전역에서도 직영점을 열었다. 창업 당시 역전의 천막에 불과했던 성심당이 56년 만에 대전역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입성한 거다. 

대전역엔 세 개의 긴 줄이 있는데 하나는 매표창구 줄이고 또 하나는 화장실 줄,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성심당 튀김소보로 전용 줄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로 대전역점도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최근엔 대전컨벤션센터에도 직영점을 냈다.

 

 

#2. 본질

경부선 상행선 열차에 튀김소보로의 구수한 향기가 진동하기 시작하자 성심당은 서울 나들이를 하게 된다. 롯데백화점 본점(서울 소공동)이 ‘일주일 팝업스토어’를 제안했고 이 끈질긴 구애에 못 이겨 성심당은 2013년 1월 14일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팝업스토어(NO.1 베이커리 성심당 초대전)를 열었다. 

역시 대성공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줄만큼이나 포털사이트 실시간검색어 1위 자리도 하루 종일 지켰다. 일주일간 2만 명에 가까운 서울시민이 줄을 섰다. 2013년 부산 나들이(부산 롯데백화점)에선 일주일간 3억 원어치가 팔렸다. 서울 나들이 때의 2배에 달하는 성과였다. 2014년 두 번째로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열흘간 팝업스토어를 열었을 땐 4억 3200만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롯데백화점은 원하는 자리, 원하는 크기만큼 자리를 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임 대표는 거절했다.

“굳이 서울에서 영업을 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성심당의 본질, 정체성을 잃는 것이니까요. 대전 상권이 둔산으로 옮겨갔을 때도 이곳에서 자리를 지킨 것도 같은 이유예요. 환경이 바뀌면 본질이 흐려질 수밖에 없는데 이 본질의 가치를 잃는 것은 생명력을 잃는 것이라고 봐요. 대전 밖의 성심당은 존재의 당위성을 부여받기 어려워요. ‘성심당은 대전에 와야만 만날 수 있다’는 그 희소성도 성심당의 본질 가운데 하나니까요.”

성심당이라는 브랜드 인지도가 커지면서 프랜차이즈 사업에 대한 요구도 많아지고 있지만 임 대표의 머릿속엔 성심당 프랜차이즈 같은 건 없다. 프랜차이즈에 대한 트라우마가 여전히 크다. 2006년 동생 기석 씨를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게 된 것도 그 시작은 프랜차이즈였다.

“성심당 프랜차이즈는 성립 자체가 안 돼요. 파리바게뜨나 뚜레쥬르와 경쟁을 하는 건데 그게 되겠어요? 프랜차이즈는 가맹본부(성심당 본점)과 가맹점(개인사업자)의 거래입니다. 가맹점을 한다고 하면 임대료도 내야하고 인건비도 줘야하고 해서 본점의 가격·품질 구조를 맞출 수가 없어요. 성심당과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차별화되는 건 가성비, 즉 가격 대비 품질이 좋다는 건데 가맹점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가맹점이 본점처럼 하려면 수익을 낼 수가 없어요. 구조적으로 안 됩니다. 동생이 프랜차이즈 사업을 한다고 했을 때도 이런 생각 때문에 말렸던 건데 결국 실패했고 그 부담이 고스란히 성심당 최대 위기의 씨앗이 됐어요. 큰 욕심 부리지 않습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를 지켜나가는 것도 버거워요.”

 

 

#3. 기적

성심당은 태생 자체가 기적이다. 창업주는 1950년 12월 23일 바람 찬 흥남부두에서 가까스로 마지막 피난선(메러디스 빅토리호)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이틀 뒤 거제도에 도착해 은인을 만나 거처를 얻을 수 있었고 진해로 이주한 뒤엔 냉면을 삶아 가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여기서 첫 아들 영진을 얻었다. 진해에서 영광스러운 아들을 얻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 가는 기찻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임 씨 가족은 통일호에 몸을 실었다. 종착지는 서울이었지만 기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더는 갈 수가 없었다. 기차가 멈춰선 곳이 바로 대전이다. 언제 출발할지 모를 기차만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던 상황. 그래서 대전에 정착하기로 했다. 삶이 막막했지만 대흥동성당 오기선 신부를 만나 밀가루 두 포대를 얻게 되면서 성심당의 역사가 시작됐다. 모든 것이 신의 은총이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되는 기적이었다. 그래서 창업주는 결심했다. 욕심 내지 않고 평생 남을 도우며 살겠다고.

“평생 한 가지 일을 하면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거 같아요. 수많은 우여곡절을 참고 견뎌내야 하니까요. 평생 나누며 살겠다는 창업주의 정신이 성심당의 존재 이유이고 그 뜻을 거스르지 않고 이어온 게 성심당이 창업 60년을 넘길 수 있었던 가장 큰 밑거름이었다고 봅니다. 우직하게 이 자리에서 본질을 지켜가는 것이 곧 성심당의 미래입니다.”

1970년대 중반 무렵 성심당의 2세 경영시대가 열렸다. 임 대표는 충남고를 졸업하고 1973년 충남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했지만 기울어가는 가업을 포기할 수 없었다. 빵 기술을 빠르게 흡수해 나간 임 대표는 1980년 성심당의 베스트셀러, ‘튀김소보로’를 완성했다. 단팥빵의 달콤함과 소보로의 고소함, 도넛의 바삭함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빵을 만들어보자는 시도였는데 대박이 났다. 1983년엔 ‘3시간 지속 포장빙수’를 업계 최초로, 1985년엔 전국 두 번째로 생크림 케익을 내놓았는데 이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물론 성심당의 성장기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비의 순간이 지속적으로 찾아왔지만 기적처럼 회생했다.

“(6월항쟁)격변기에 시위대에게 빵을 나눠줬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기도 했고 대기업 프랜차이즈 제과점 등장, 대전 둔산동시대 개막과 같은 악재에 위기를 맞기도 했어요. 동생이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었다 빚만 남기고 부도를 내는 바람에 성심당 본점까지 크게 휘청거렸고 2005년 발생한 화재는 결정타가 됐어요. 다들 잿더미로 변한 성심당은 이제 끝났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위기 때마다 대전시민이 성심당을 구해줬어요. 변함없는 애정으로 빵집에 줄을 서 준 은인들입니다. 그 덕분에 임직원 모두 힘을 낼 수가 있었어요.”

창업주는 그날 팔고 남은 빵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줬지만 선대의 뜻을 이어받은 임 대표는 아예 어려운 이웃과 나눌 빵을 따로 굽고 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가치를 아는 이 나눔의 미덕이 기적의 씨앗이 된 건 아닐까. 

 

 

#4. 창조

동네 빵집 하나가 이런 팬덤(fandom)을 만들어낸 건 기적이다. 돈으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감동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라 그 의미는 남다르다. 파리바게뜨·뚜레쥬르와 같은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의 공세에도 결코 밀리지 않는 이 팬덤은 성심당을 60년간 지켰고 결국 대전의 대표 문화관광 아이콘으로 만들어냈다. 서울시민이든 부산시민이든, 이제 ‘대전’ 하면 ‘성심당’이 가장 먼저 기억에서 소환된다.

대전 원도심 동네빵집에서 일약 전국적인 스타덤에 오른 성심당의 가장 큰 힘은 바로 가치를 창출하고 그 가치 키우는 능력인데 그 중심 가치가 바로 ‘모두를 위한 경제’(EoC)다. 선친이 신앙심의 발로에서 나눔을 실천했다면 임 대표는 그 뜻을 이어가면서 한 발 더 나가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성심당의 미래상을 그렸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성심당에 ‘EoC’라는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지면서 내부 조직에도 신선한 바람이 불었다. EoC에 기초한 ‘모든 이가 좋게 여기는 일을 한다’는 경영이념이 지속가능한 성심당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좌표로 자리 잡으면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임 대표는 성심당을 법인(㈜로쏘)으로 전환하고 투명경영의 기틀을 다졌다. 동생의 프랜차이즈 사업 실패로 수십억의 빚더미에 앉았지만 세금만은 정직하게 납부하고 나눔을 위한 기금도 적립했다. 경영이 정상화된 뒤부턴 수익의 15%를 직원들에게 돌려주고 로컬푸드 이용 등 친환경 경영에도 힘을 쏟았다. 적자기업이 무슨 나눔이냐는 반론도 거셌지만 직원들과 소통하면서 성심당의 미래상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2005년 화재 사건 이후 직원간 동료애가 더욱 단단해지면서 팀워크가 성심당의 미래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매주 사보 형태의 ‘한가족 신문’을 만듭니다. 50페이지 정도 돼요. 성과를 공유하고 직원들의 인생 스토리를 나누기도 하는데 재미있는 건 모든 이가 좋게 여기는 일을 하자는 경영이념을 실천하는 이야기들이 소개가 돼요. 표현을 잘 하는 직원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직원도 있거든요. 그래도 어떻게 하겠어요. 실천성과가 인사고과에 반영이 되는데. 긍정의 힘은 참 놀라운 거 같아요. 사랑과 나눔을 표현하는 게 서툴렀던 직원들도 서서히 바뀌더라구요. 좋은 일을 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창의적으로 발전하구요. 이런 긍정의 에너지들이 모이니 자연스럽게 회사 분위기도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친형제 같은 동료애가 지속가능한 성심당의 원동력이 될 겁니다.”

성심당 한가족 신문은 최근 발간 500호를 넘겼다. 신문이 쌓인 만큼 성심당의 기초체력도 더욱 견고해졌다. 투명·윤리경영, 나눔, 사회공헌, 친환경과 같은 지속가능성의 키워드들이 촘촘하게 네트워크를 형성해 이제는 ‘모두가 행복한 경제’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한참 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제과제빵 브랜드들이 성심당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대전을 찾는다.

“요즘 공을 들이고 있는 과제는 대전에 제과·제빵 박물관 혹은 테마파크를 만드는 겁니다. 부지도 알아보고 있고 무엇으로 채울지 콘텐츠도 고민하면서 사업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일본 삿포로의 초콜릿박물관이나 체코 맥주산업관광 인프라 같은 지역 특색을 살린 문화관광 인프라 확대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성심당은 빵을 팔지만 대전시민은 자부심을 산다.

글=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사진=전우용 기자   yongdsc@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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