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부부들이 마리아와 요셉처럼 삶을 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여인들은 해마다 임신을 했을지도 모른다. 당시는 피임법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아와 요셉의 삶을 살았던 이도 진짜 있단다. 바로 하인리히 2세(Heinrich 2:973~1024)와 그의 부인 쿠니쿤데(Kunigunde:980~1033)다. 이들은 정말 요셉과 마리아와 같은 삶을 살았다 하여 후에 성인성녀의 반열에 올랐다는데, 부부가 부부생활을 안 했다고 그만큼 성스러운 것인가? 더 우스운 브로이어스의 해석이다. 과연 그들이 그렇게 살았겠는가? 아마도 두 양반이 다른 의미로 어떤 문제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당시의 대도시에는 합법적인 창녀촌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큰 도시에 비해 작은 도시에 살았던 남자들은 성적인 욕구를 발산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일단 오늘날은 대도시라 하면 우리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을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중세의 도시는 좀 달랐는데, 당시의 대도시는 평균적으로 1만 명 조금 넘는 정도라고 한다. 혹 0 하나를 덜 붙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자료를 다시 확인해 보아도 만 명이 확실하다. 도시라고 하지만 사실은 오늘날의 작은 마을과 같은 인구였다. 그럼 소도시는? 중세 자료에 2000명 아래였다고 나온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 인구가 좀 많았는데, 밀라노 같은 경우는 1300년경 약 10만 명이었고, 나폴리는 5만 명이었다. 그럼 당시의 쾰른은 4만 2000명 정도. 당시 도시에 사는 이들은 전체 인구의 20~25% 정도였다니, 아무리 따져도 오늘날의 인구에 비해서는 진정 비길 바가 못 된다.

이런 대도시에만 주어진 것이 바로 시에서 경영하는 사창가인데, 여기서 일하는 여인들에 대한 칭호도 도시마다 다양한 이름으로 주어졌다. 하나만 언급해보면 ‘자유로운 딸들(Freie Toechter)’이다. 이런 사창가에서는 주로 돈 없어 결혼하지 못하는 수공업자들, 학생들, 군인들 등등의 젊은 남성들이 드나들었다. 찌스터찌엔저 수도원의 수도승인 릴레(Alain de Lille: 1120-1202)가 고백성사를 받으러 온 한 젊은이에게 던진 질문을 보자. “사창가에 갔었느냐?” 그리고 “좋았느냐?”고. 만약에 젊은이가 “예스”로 대답하면, 수도승이 “그럼 나도 너에게 죄보속을 경감해 주겠다”라고 브로이어스가 전한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당장에 아이구 세상에나!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그들의 문화였다는 사실을 우린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참고도서의 저자가 자그마치 약 300권의 책을 인용했으니 충분히 역사적인 기록물에서 나온 것은 틀림이 없다고 보는 필자의 견해다.

위 수도승이 그것도 죄를 고백하는 고백성사에서 이런 질문이 오갔다는 자체가 당시의 사창가는 젊은이들에게는 합법적인 장소였다는 것을 잘 암시한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신학자가 뒷받침하는 교리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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