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항쟁 30년 후 촛불로 일어서다

1987년 6월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정부를 향해 민주국가의 참다운 모습을 보여 달라고 소리쳤다.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권리, 독재 청산을 통한 민주주의의 회복을 외쳤다. 그 외침엔 세대의 구분도, 신분적 구별도 없었다. 그 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필사적이었을까. 

2017년 그 광장엔 자욱한 최루탄 연기대신 환한 촛불이 밝혀졌다. 항쟁의 기억이 없는 이들과 30년 전 항쟁의 중심에 서 있던 이들이 꿈꾸는 ‘그날’은 결이 같았다. 불의에는 정의로, 비상식엔 상식으로 맞서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라는 질문에 ‘그렇게 세상은 바뀌었다’고 답할 수 있는 나라, 아직 1987년과 2017년이 꿈꾼 ‘그날’은 오지 않았다. 최근 개봉한 영화 ‘1987’에 관객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읽혀진다. 편집자

<글 싣는 순서>
1. 외침…“호헌철폐, 독재타도”<1월 14일자 기사보기>
2. 대전의 6월을 이끈 보통 사람들<1월 15일자 기사보기>
3. 1987년 미완의 ‘그날’
 

역사에서 우연이란 없다. 우리가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는 건 역사에 담긴 구조적 연속성 때문이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에서 1980년 5월의 광주와 1987년 6월 민주항쟁, 2017년 광장의 촛불을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이유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해 겨울 광장의 촛불은 30년 전 미완에 그친 ‘그날’의 종착지가 아니라 경유지가 돼야만 한다.

2016-2017년 겨울, 보통사람들은 민주주의의 퇴보 앞에서 다시 들고 일어섰다. 역사의 진보와 맞물려 최소한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작동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후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절망을 느꼈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그 광장엔 영화 속에서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고 울부짖던 제2, 제3의 연희들도 함께했다. 촛불행렬에 동참했던 대학원생 최지영(26·여) 씨는 “처음엔 ‘촛불 든다고 나라가 바뀔까’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촛불의 물결이 커질 때마다 우리 사회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주권자인 국민의 힘을 새삼 실감했다”고 뿌듯해했다.

짧은 민주화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은 이제 무능한 지도자를 시민의 힘으로 끌어내릴 수 있을 만큼 성장했지만 ‘그날’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6월 민주항쟁으로 최소한의 민주주의는 달성했으나 그 이후 우리의 민주주의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탓이다. 우리나라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국가로 성장하기까지 아직 갈 길이 먼 이유이기도 하다.

광장의 촛불 이후 해결해야 할 과제도 산적하다. 민주화 과정에서 벌어졌던 권력에 의한 숱한 희생과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처벌 대신 호의호식을 누리고 있으며 부당한 권력에 맞섰던 이들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엘리트들에게 허락된 특혜와 특권도 여전하다. 최근 독일 사법부가 70여 년 전 유대인 학살에 관여한 죄로 96세의 과거 나치 유대인 수용소 경비원에게 “국가권력에 의한 범죄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당사자가 뉘우치더라도, 단순히 지시를 따랐을 뿐이더라도, 지위가 일개 말단일지라도 엄벌에 처한다”며 실형을 선고한 사례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87년 항쟁 당시 충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사무처장을 맡아 민주화 열기에 동참했던 장수찬 목원대 행정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의 절차적 민주주의는 촛불을 통해 다시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소위 엘리트들의 담합구조를 정리하는 건 민주화의 연장선상에서 반드시 수반돼야하는 일”이라며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모든 국민이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게 됐을 때 비로소 1987년 꿈꿨던 ‘그날’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끝>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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