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비죽과 고다리의 결투⑦

고다리가 만약 멧돼지머리를 보내지 않고 평범한 병사들을 보냈더라면 비죽은 결코 멧돼지머리의 시신을 되돌려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비죽은 멧돼지머리를 잔인하게 죽여 적들에게 모골이 송연한 두려움을 안겨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단수가 아주 얕은 사람들의 머리에서나 나올 수 있는 얕은꾀에 불과했다. 평소의 비죽 같으면 이렇듯 수준 낮은 작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고다리의 계산대로 병사들의 분노가 검붉은 쇳물처럼 달아올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적들의 괴성에 모골이 송연해져 사기가 떨어졌던 댕글라 병사들이었다. 병사들은 너도나도 전위병으로 나서겠다고 했다. 소홀하게 만들어진 비죽의 작전이 결과적으로 실패했음을 입증하는 사건이었다. 고다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적들이 버섯지붕과 움집 등에 꼭꼭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챈 고다리는 불화살로 통닭을 만들어 버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푸른돌이 말렸다. 팬주룽 최고부족의 선진화된 시설들을 없앨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푸른돌은 팬주룽을 통일한 다음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올래를 팬주룽의 거점으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비죽은 잔뜩 고무돼 진격을 명령했다. 버섯지붕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움집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튀어 나왔다. 얽히고설킨 개미굴에서 개미들이 우글우글 기어 나오는 것 같았다. 고다리가 기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실개천을 노도(怒濤)처럼 넘어오는 비죽의 군사들에게 화살이 쏟아지고 댕글라의 정예병들이 달려들었다. 천오백 비죽의 군사들이 한꺼번에 한곳의 목표지점을 향해 내달렸다.

올래의 정예병은 물론 남자와 여자, 노인과 어린이, 절름발이와 병든 사람 할 것 없이 무작정 달려가는 모습이 마치 지옥에서 탈출하는 죄수들 같았다. 얽히고설킨 육박전…, 부대를 나눠 수적으로 불리한 댕글라 군사들이 썰물처럼 후퇴를 했다.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댕글라 군사들과 똑같은 허수아비들만 다물다물 쌓여 있었다.

“이건 뭐야? 아차! 속았다.” 비죽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궁둥백과 름을 비롯한 장수들과 병사들도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허수아비들만 쳐다봤다. “놈들의 속임수에…” 름이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후방에서 괴상망측한 소리들이 우락부락 하늘을 찔러댔다. 냉철함을 잃은 비죽 덕분에 텅 빈 버섯지붕을 아주 손쉽게 점령한 댕글라 병사들이 지르는 소리였다. 괴상망측한 소리들 중 의기양양한 오소리눈이 지르는 소리가 제일 컸다. 괴상한 소리들은 앞에서도 들려왔다. 화살이 앞과 뒤에서 그칠 줄 모르고 쏟아졌다. 삽시간에 연합군 삼분의 일 이상이 쓰러졌다. 남아있는 군사들은 그물에 걸린 피라미들처럼 우왕좌왕 엎치락뒤치락했다. 비죽을 비롯한 어떤 유능한 장수도 이 상황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화살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은 에워싼 댕글라군의 창칼에 무참히 찔려 죽었다. 빗발치듯 쏟아지던 화살이 순식간에 멈췄다. 그대로 뒀다간 전멸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떨궜다. “항복하겠는가!” 목구멍에 녹슨 칼을 박아두고 지르는 것 같은 목소리, 소름이 돋았다. 비릿한 피냄새가 바람을 따라 다니다가 날짐승들의 후각을 자극했다. 비죽은 괴성을 지르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독수리들을 한참동안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비죽은 삼베로 짠 천에 잿빛 고래가 그려진 깃발을 번쩍 들어올렸다. 고래는 쌍꺼풀진 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다란 분수를 힘차게 뿜어 올리며 표표히 나부끼고 있었다. 항복의 표시였다. 고다리는 팬주룽 최고 부족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팬주룽을 통일시켰다. 겨우 한나절 반 만에 이룩한 대승이었다. 초여름에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이 고다리를 더욱 기분 좋게 만들었다. 고다리는 기쁨에 들떠 그날을 경사의 날로 정했다. 팬주룽을 통일했으니 말하자면 국경일인 셈이었다. 미천한 신분에서 얼떨결에 벼락출세를 한 푸른돌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천성이 포악하고 잔인한 고다리의 통치방법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고다리는 댕글라로 돌아가지 않고 올래에서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올래의 음식은 주로 해산물들로 댕글라 사람들은 물론 고다리도 아직 먹어보지 못한 것들이 풍성하게 많았다. 고다리는 대규모 군사들을 보내 산속 짐승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오라고 명령했다. 태양이 올래의 바다로 가라앉고 횃불들이 춤을 추자 잔치는 무르익었다. 이긴 자들만의 잔치, 승리한 자들은 기쁨에 들떠 춤을 추고 패배한 자들은 그들의 시중을 들며 버려진 음식들을 주워 먹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까지는 몰랐다. 팬주룽의 절대적 영웅이 악으로 뭉친 무리를 응징하러 온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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