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우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위원장

 

2000년 12월에 여성학 전공자, 사회단체 활동가 등으로 구성된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100인위)'가 당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진영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 17명을 공개하여 파장을 일으켰다. 100인위가 가해자로 지목한 사람들의 실명과 사건 내용을 공개한 것은 조직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은폐하고 왜곡해 왔던 운동권 내 성폭력 사건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명 공개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민주노총은 성명을 내어 노동운동 내부의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성폭력과 성희롱에 대해 인정하고 그와 같은 현실을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노동조합과 사회단체들은 여성 활동가를 억압하는 운동권 내 가부장적 구조에 대해 본격 토론하기 시작했고, 그동안 은폐되었던 성폭력 사건들이 드러났으며, 성폭력으로 인한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직접 나서기도 했다.

그런 활동의 결과 성폭력 해결 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주의가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성폭력 사건을 인식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입장을 존중해야 하며, 피해자와 가해자의 주장이 엇갈릴 경우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조합과 사회단체들이 성폭력, 폭언, 폭행 금지와 처벌을 위한 규정을 제정하고, 노조 활동가들에 대한 성폭력 방지 교육을 의무화한 것도 100인위 활동이 남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반면 100인위 발표를 비난하고 맞서는 입장도 있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소설로 이름이 알려진 소설가 박일문 씨는 100인위 회원과 피해자 등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지만 검찰에서는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당시 성폭력 가해자로 재판을 받고 있었던 박 씨는 나중에 대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었다.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2018년 현재 미투(#Me too) 운동의 열풍이 검찰, 문화예술계, 정치권를 강타하고 온 국민의 일상까지 파고 들고 있다. 미투 운동은 2006년 미국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성범죄에 취약한 유색 인종 여성 청소년을 위해 시작한 캠페인이다. '당한 것은 너만이 아니다. 나도 당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었고, 성폭력을 경험한 여성들 사이에 공감을 통해 연대의식을 높이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2017년 10월에 배우 알리사 밀라노가 트위터를 통해 제안하면서 미투 운동은 '나도 당했다'는 고백에 머물지 않고 '나도 고발한다'는 적극적인 운동으로 나아갔다. 세계 80개 이상 나라에서 SNS를 통한 미투 해시태그(#Me too)로 성폭력 고발이 이어졌고, 권력형 성폭력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가부장적 문화가 공고한 우리나라에서는 가정과 일터에서 일상화된 성폭력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연일 드러내고 있다.

100인위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일각에서는 미투의 부작용을 들먹인다. 안희정 씨가 합의에 의한 관계라고 강변하고, 소설가 하일지 씨는 대놓고 미투 운동을 폄훼하고 있다. 박일문 씨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쏟아지는 비판을 모면하려는 몸부림일 뿐 법과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다.

미투 운동은 '나도 당했다'고 하는 피해자들의 결단과 용기를 응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도 함께 가해자를 고발하겠다'고 연대하고 행동하는 사회운동이다. 미투 운동 자체에 이미 '함께 하겠다(위드 유, #With you)'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다. 은연 중에 피해자를 강조하는 위드유(#With you) 선언보다는 미투로도 충분하다. 기왕이면 미투라는 영어보다 '가해자를 고발한다!'고 분명하게 우리말로 하면 더 좋겠다.

18년 전 100인위가 운동권 내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그 해법을 마련하는 논의의 출발점이 된 것처럼 미투 운동이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가부장적 구조와 일상화된 성폭력을 혁파하는 거대한 물결이 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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