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근무 마감

금강일보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효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임석원의 자전적 에세이 ‘나는 내 아내가 너무 좋다’를 온라인판을 통해 연재합니다. ☞본보 2017년 8월 9일자 10면 보도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출생한 우리나라 베이비붐 세대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세대로, 임석원의 에세이는 그 시대에 태어나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도 많았겠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한 가지도 해 보지 못한 채 오직 가족만을 위해 굳세게 살아온 한 남자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곁에서 묵묵히 좋은 동반자가 되어 준 아내에 대한 절절한 고마움을 전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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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근무 마감

당시 회사의 해외 근무 직원 의무 근무기간은 2년이었다. 회사에서 공사를 수주하게 되면 그 공사를 수행할 조직이 구성되고 그 구성원들은 원칙적으로 그 공사가 끝날 때까지 근무해야 한다. 단 2년 근무 후 회사에 청원을 하여 본국으로 근무지를 이동할 수 있었다. 나의 계획도 2년이었다. 1986년 2월 초, 3월 초에 귀국하겠다고 귀국원을 제출하였다. 그런데 부소장으로서 관리 전반적인 업무와 자재업무를 총괄하던 이 이사님께서 나의 귀국 발령을 내주지 않았다. 이런 청천벽력이 있나? 내가 귀국하면 수입자재업무 마무리를 할 사람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마감공사가 완전히 다 끝날 때까지 3~4개월 정도 더 근무하라고 하였다. 나는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부소장 방을 나왔다. 솔직히 나는 이 부소장의 말을 따라 몇 달 더 근무하고 싶었다. 집값은 다 치렀지만 2년을 고생한 아내와 나의 수중에는 한 푼도 들어온 것이 없었다. 이왕 고생한 것 몇 달 더 근무해서 우리 둘만의 돈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말했더니 완전 난리였다. 2년을 어떻게 견디어 왔는데, 도대체 시집에 데려다 놓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고 차라리 죽으라고 하라고. 3월 말이나 4월 초에 애 낳다가 죽는 꼴 보려고 그러냐고. 한 아이 죽였으면 됐지, 또 나오는 아이 죽이려 하느냐고….

아내와 통화를 하고서 수입자재 청구 부서인 공무부 외주팀장인 홍 차장에게 밖에 나가서 저녁을 하자고 했다. 그는 고등학교 선배였기에 나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선배님’이라고 불렀다. 시내 한 음식점에서 만나 저녁을 함께 들면서 나는 홍 차장에게 나의 가정과 아내의 이야기를 했다. 애 낳기 전, 3월 말 안에 귀국하여야 하니 선배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사정 얘기를 했다. 모든 수입자재는 홍 차장이 있는 공무부 외주팀에서 자재팀인 나에게 구입 요청을 하였다. 각 수입자재마다 구입처를 자재팀에서 결정하였지만 발주처 승인은 공무부 외주팀에서 받았기에 외주팀에서도 각 수입자재 구입처 기록을 갖고 있었다. 혹 발생할 수 있는 마감자재의 부족량 정도는 외주팀에서 오더하고 경리팀에서 송금하면 된다. 내가 먼저 귀국하더라도 이렇게 업무 프로세스를 바꾸면 된다. 마침 부소장인 이 이사님이 2월 말 즈음 귀국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이 이사님 귀국하고 나면 업무처리를 이렇게 해도 된다고 소장님한테 말씀드릴 테니 내가 3월 말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였다. 2월 말 이 이사님은 상무로 승진하고 본사 관리본부장으로 발령받아 귀국하였다. 이 이사님은 귀국하면서 “나 귀국한다고 임 대리 따라 들어오면 안 돼!” 라고 말씀하였지만 나는 한 달 더 근무하면서 내가 맡은 일을 거의 다 마무리 짓고 소소한 잔여 업무는 자재팀 잔여 인원에게 인계하고 3월 말 귀국하였다.

딸 지영이 태어나기 1주일 전에 귀국했다. 귀국 휴가기간 중에 아내는 예쁘고 건강한 딸을 낳고 나는 아내의 산후조리를 맡았다. 그리고 서울로 이사를 했다. 이삿짐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동생들이 짐을 다 들여놓고 가구들도 자리를 잡아 앉히고 한바탕 청소까지 하고서 대전으로 출발하였다. 이제야 결혼 3년 만에 다시 우리 둘과 갓 나은 딸 지영이의 가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아내와 나는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우리 집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그동안 아내도 나도 수없이 울었다. 아내는 첫아이를 잃고 병원에서 혈압이 급상승하며 안정을 못 찾고 그야말로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나도 현장에서 안전사고로 쓰러져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이송되기도 하며 2년 넘게 더운 나라에서 고생했다. 그러나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똑같은 집, 아내가 시집오면서 맞춘 똑같은 커튼, 똑같은 소파와 테이블, 똑같은 식탁, 똑같은 밥솥, 똑같은 그릇, 똑같은 수저, 똑같은 컵…. 2년 동안 나는 아내에게 무슨 일을 시킨 건가? 어찌 이리도 가혹한 남편이었나? 아내에게 돌아온 거라고는 하나도 없지 않은가? 아~! 정말 나쁜 남편 아닌가? 결혼하지 않고 한 번 더 해외근무하여 돈을 벌어서 집안을 제대로 해 놓고 결혼했어야 옳지 않았나? 3년 전 결혼한 거 하고 지금 결혼하는 거 하고 뭐가 다르단 말인가? 하나도 다른 게 없었다. 나야 큰아들로서, 큰형 큰오빠로서 내 할 일 했다지만 아내는 뭔가? 아내는 남편 잘못 만나 죽도록 고생만 했다. 이러한 아내에게 나는 평생 갚아야 할 빚을 진 것이 되었다. 대전에서 이사 오기 전 어머니만 우리 두 사람에게 “너희 둘 다 고생했다. 그래도 나중에 이 집이 너의 것 되지 누구 것 되겠느냐?” 하셨지, 아버지와 동생들은 그냥 우리 집일 뿐, 아무런 생각이 없다.

내가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업무를 시작한 지 며칠 지난 어느 날 같은 현장에 근무하던 관리 김 대리와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그는 내 주소를 보고서 자기도 서울 홍제동 같은 아파트에 산다고 나를 찾아왔다. 함께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의 이력도 나와 비슷했다. 학교 졸업 후 그도 (다른 회사에서) 사우디 나가서 돈 벌어 홍제동에 아파트 사고 결혼했다. 젊어서 돈을 좀 더 모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 우리 S건설에서 싱가포르에 공사를 수주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경력사원으로 우리 S건설로 옮겨왔다. 중동에서 근무환경이 너무 안 좋았기에 좋은 환경의 싱가포르에서 근무하고 해외 급여 받으며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싱가포르로 나오면서 홍제동 아파트 전세 놓고 전셋돈 받아서 은행 융자금 보태 여의도에 아파트 한 채를 더 샀다고 했다. 아내는 친정으로 보냈다고 했다. 나 보고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왔다. 나도 홍제동 아파트 전세 놓고 대전에 집을 사려고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김 대리는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아니 서울에 아파트를 사 두어야지 왜 시골인 대전에 집을 사려고 해? 5년, 10년 지나면 집값이 두 배, 세 배는 차이가 날 걸?”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의 계획을 말해 무엇하랴?

김 대리가 또 물었다.

“아내는?”

“아내는 시집에 들어갈 거야.”

“아니, 남편도 없는 시집에 들어가 어떻게 살아?”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시골 사람이어서 아내를 친정에 보내겠다고 말도 못 꺼내.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머릿속엔 딸은 ‘출가외인’이라는 옛말 그대로야. 내가 아내를 친정에 가 있게 하자고 하면 우리 어머니는 ‘며느리가 시집을 왔으면 우리 식구가 된 거다. 친정은 이제 남의 집이다. 왜 남의 집에 가 있어?’ 이렇게 말씀하실 게 뻔해.”

나는 아버지 어머니를 완전 시골 사람으로 만들고 짐짓 꾸며서 이렇게 대답을 했다.

김 대리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싱가포르 나간 목적은 나와 아내의 재산을 늘리려 나간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편히 쉬실 집, 동생들이 친구들 들어오라고 할 수 있는 좋은 집을 마련하는 게 목적이었다. 나의 초점은 아버지 어머니의 편히 쉼과 기뻐하심이었다. 그리고 동생들에게는 남들 못지않은 집안 환경을 만들어 주는 거였다. 그러니 아내는 남편 없는 시집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했다. 장사하시는 어머니 대신 집안 살림을 깔끔하게 하고 온 식구들이 들어와서 안락하게 느낄 수 있는 집을 만들고 가꾸어야 했다. 동생들 가르치느라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두고 어떻게 친정에 가 편히 있을 수가 있는가?

아내와 나에게 싱가포르 근무란, 아내는 시집에서 나는 해외에서 그렇게 고생하기로 한 것이었다. 가양동 집이 동생들 결혼하고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면 우리 재산이 될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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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임석원은...

1956년 지리산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대전고와 한남대를 졸업한 후 1980년 S그룹 S건설에 입사해 23년을 근무하면서 사우디·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 8년간 생활했다. 2003년 영국 유통회사 B&Q 구매이사, 2004년 경남 S건설 서울사무소장으로 일했다. 2009년 H그룹 H건설에 입사해 리비아에서 자재·장비 구매업무를, 2011년 E그룹 E건설에 입사해 중국과 동남아 대외구매를 담당했고, 2013년에는 전북 J건설 소속으로 사우디에서 근무했다. 지금은 34년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미군부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면서 여러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분당 판교지역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인생 후반기엔 ‘책 읽고 여행하고 글 쓰는 삶’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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