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균 한국효문화진흥원 효문화연구단장

몇 해 전 미국에서 한국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갈 때의 일이다. 마침 뉴욕대학에서 한국학 전공 교수로 있는 선배에게 효 관련 국제학술대회를 미국에서 한번 갖자고 제안했다. 거두절미하고 대답은 간단했다.

“미국에 효는 없다. 미국인 교수들에게 효개념 설명하는 것만도 며칠은 걸릴 수 있다.”

효를 영어로 번역하면 filial piety, 혹은 filial duty다. 사랑은 love, 예절은 etiquette, 공경은 respect라고 하는 것과 달리 효는 한 단어가 아닌 두 개의 단어로 된 숙어 형태다. 효의 상황과 분위기를 전달할 뿐 그에 꼭 맞는 개념은 없다. filial이란 ‘자식의’ ‘자녀의’란 형용사고 piety와 duty는 경건, 의무, 직무란 뜻이다. 영어로 번역된 동양의 효란 ‘자식의 경건한 모습’ ‘자녀의 의무’ 정도로 해석된다. 한마디로 부모 자녀 관계에서 나온 의무로 효를 설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자신의 삶 속에서의 효를 설명했다기보다는 동양의 효를 해석한 측면이 강하다.

서양인에게 부자 관계는 우호적 애경(愛敬)보다는 대립적 긴장 관계에 더 가깝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아버지 크로누스와 아들 제우스는 사랑과 공경과는 거리가 먼 끝없는 대립 긴장 관계다. 아버지가 자식을 삼켜 버린 건 아들이 자신보다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까닭이다. 자식을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경쟁의 대상, 공포의 대상으로 여긴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제우스는 아버지를 죽인다. 이런 신화적 사고가 서양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한 서양에 효란 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프로이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정신분석학 이론을 정립한다. 원초적 인간 본성에서 부자 관계는 동양에서처럼 친친(親親), 친애(親愛)의 우호적 관계가 아니다. 오로지 경쟁적 긴장 관계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부자 관계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내용이다. 동양적 관념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패륜범죄에 근친상간의 내용이 담겼다. 애당초 효 개념이 나올 수 없는 분위기다.

기원전 18세기로 추정되는 함무라비 법전에는 ‘자식이 부모를 폭행하면 손을 잘라야 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폭력에 대한 징벌적 의미일 뿐 역시 효라고 볼 수 없다. 효 개념이 없는데, 효학, 효문화, 효사상, 효윤리가 나올 리 만무하다. 다만 서구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준 성경(십계명)에서는 부모 공경을 강조했다. 대략 기원전 15세기의 일이고 이후로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 서구 신학자의 효관련 언급이 눈에 띈다.

그렇다고 서양문화가 가족중심의 효문화로 변했거나 발달한 건 아니다. ‘25시’의 저자 게오르규가 “서양에서는 늙는다는 것은 부끄럽고 무시무시한 일이다. 파리의 한 늙은이는 하얀 머리카락을 염색하고 다닌다. 노동 세계에서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또 파리에는 내 친구 중에 한 멋쟁이 노인이 있는데, 밖에 나가길 꺼린다. 골목의 아이들이 쫓아다니며 ‘영감아 빨리 죽어라’는 조롱 때문이다”라는 말이 오히려 서구사회를 대변한다.

‘인간의 정감 상 차마 그럴 수 있을까’, ‘극단적 상황만을 끄집어서 서구사회를 매도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대답은 간단하다. 서구사회에서 동양적 효와 비슷한 특수상황은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이를 설명하는 개념적 단어로써 효는 없다. 따뜻한 가정 분위기, 정감넘치는 부자 관계는 가능하지만 그것을 효라 표현하지는 않았다. 개인의 인격, 인권을 중시하는 풍토 속에서, 어찌보면 종속적일 수 있는 공동체 중심의 효개념이 합리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시기까지 부모가 자녀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것은 보편적 가치 속의 사랑(love)의 일부이고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는 것은 ‘자녀의 경건한 모습(filial piety)’으로 종교적 함의가 담겼다. 일상 속의 정감넘치는 동양적 효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 결론적으로 서양에 효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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