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회
사회부장

마주한 그들이 쓴 소주 몇 잔 기울이고 김빠진 맥주마냥 싱겁게 토하던 푸념이 그 때는 취중 술잔에 담긴 윤슬인 줄 알았다. 와병 중인 부모님 근황을 전할 땐 눈가가 살짝 울컥했고 딸내미, 아들내미 대학 등록금 걱정할 땐 주름이 생기를 잃었던 것을, 저축이 아니라 갚아야 할 굳은 살 박힌 빚 때문에 금리에 예민했던 것을. 얼마간의 세월 동안 내 기억 속에 농축된 그들의 탄식조가 새삼 폐부를 관통하는 건 요즘이다. 아등바등 살아도 좀처럼 이문 남지 않는 게 삶이라지만 그들의 대차대조표는 유난히 초라하다. 사람은 제 밥그릇 쥐고 난다지만 그들의 밥그릇은 대접은커녕 넉넉히 쳐줘야 종발(鍾鉢) 태생이다. 부모님 봉양에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상대적으로 이고 진 짐이 많은 사람들.

차고 넘치는 연배들로 인해 날 적부터 밥 그릇 싸움을 했고 그 유통기한에 끝이 없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낀 세대’ 베이비부머라고 부른다. 20년 가까운 사회생활에서 연을 맺은 이들 중 상당수가 베이비부머들이다. 개인적으로 ‘동네 형님’ 같은 존재들이기도 하다.

6·25 직후인 1955년부터 산아제한이 본격화되기 직전인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을 한국의 베이비부머라고 한다. ‘무턱대고 낳다보면 거지 꼴 못 면한다’던, 지금의 입장에선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옛 공익광고 탄생의 배경이라고 할까. 현재 전국적으로 약 720만 명이 같은 이름표로 살 고 있단다. 굶주림이 미덕이었던 격동의 세월을 유년기로 관통해 군사독재 시절 청년기를 보냈고, 경제 부흥의 밀알로 살다 외환위기를 정면으로 마주한 세대. 부모를 봉양하면서 자식 둘 셋을 건사해야했던 어찌 보면 마지막 세대. 자신의 노후 준비 따위는 사치가 돼 버려 운 좋게 정년을 채우더라도 밥줄 걱정을 놓을 수 없는 세대….

세상을 왜 이리 비관적으로 조망하냐고 타박해도, 누군 고생 밥 먹어보지 않았느냐고 비아냥거려도 국가의 운명이 이들에게 제공한 밥그릇이 요 모양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동네 형 대부분은 공무원이니 이들만 놓고 보자. 평균 수명이 길어지며 부모님들의 천수도 연장됐다. 누구나 곱게 죽을 복을 타고난 것은 아니니 자리보전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오롯이 자식의 몫이다. 결혼 적령기가 갈수록 늦어지는 데다 청년 취업 시장이 좀처럼 해빙기를 맞지 못하고 있다. 은퇴 전 자식들 공부조차 못 마치는 경우가 허다하니 퇴직 즈음 공무원의 ‘워너비 아이템’인 출가는 꿈도 꿀 수 없다. 정년과 연금이 보장된 공무원이 이렇다.

올해 대전시가 예년에 비해 넉넉하게 배정한 소상공인 창업지원자금은 포장을 뜯자마다 바닥이 났는데 구멍가게로 인생 2막을 시작하겠다는 사람들 상당수가 베이비부머였다고 한다.

공복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내년부터 봇둑 터지듯 할 테니 무슨 일을 도모하더라도 그들의 몸에 밴 그러나 지긋지긋할 법도 한 경쟁은 더욱 치열해 질 수밖에 없다.

온 나라가 돈 타령이다. 쓸 돈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노인 기초연금이네 보육료네 해서 복지관련 예산이 급증한 탓이 크다. 일각에서는 그 좋은 복지에 대고 ‘나쁜 복지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사회 문제를 예고한 베이비부머에 대한 정책적 배려는 희박하다. 특정 세대를 위한 국가 차원의 대책을 요구하는 게 시각에 따라선 어폐가 있겠지만 복지를 강조하다 이들에게 한 줌의 희망이 될 만한 예산조차 싹둑 잘린 게 문제다. 늘려도 시원찮을 판에 소상공인 창업지원자금이나 경영안전 자금 등과 관련된 예산이 그 자리거나 되레 줄어든 눈치다. 정권이 약속한 복지 예산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딱한 사정 봐 줄 여력이 없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렇다고 바닥에 등짝 붙인 경제 사정이 느닷없이 좋아져 ‘새파란 늙은이’들이 제 몸 놀려 애면글면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일자리가 늘어날 것 같지도 않다.

“퇴직할 때까지 자식들 공부나 마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버지가 해 준 게 뭐 있느냐’는 다 큰 아들 놈 반항을 듣고 아무 말 못했다는 친구도 있어. 산다고 살았는데 뭐 남은 게 있어야지. 이래서 낀 세대라고 하나 봐” 술깨나 하는 베이비부머 한 명의 맨 정신 푸념이 남의 일 같지 않게 귓전에 내려앉았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