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국
상무/충남취재본부장

지인 중에 ‘욱하지 말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사는 이가 있다. ‘욱하면’ 시쳇말로 ‘인생 조진다’는 것이다. 인생 경험을 통해 욱한 뒤의 후유증을 체험했고,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인지를 깨달은 터라 나름 가치관이 담긴 현명한 좌우명이다.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격한 마음에 불끈하면, 즉 욱하면 꼭 후회를 하게 마련이다. 생활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분에 넘치는 지출 감행도 그렇고, 감정을 자극하는 상대의 언행에 대한 격한 물리적 대응도 그렇다. 이성이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현명한 의사결정을 하지 않으면 개인이건, 단체건, 국가건 간에 욱한 뒤의 후폭풍에 심한 홍역을 치르게 된다.

플라톤은 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이상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두루 갖추어야 하는 세 가지 덕목으로 ‘지혜, 용기, 절제’를 역설했다. 이 중에서 감각적 욕망을 억제하도록 하는 덕목 ‘절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지혜와 용기로 삶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지만 절제가 없다면 브레이크 없는 승용차처럼 결국 파국을 면할 수 없다. 흐려진 판단력 아래 내린 의사결정으로 인해 어렵게 쌓아올린 부와 명예를 한순간에 모두 잃어버리는 수많은 사회적 명망가들의 사례가 분명한 교훈이 되기에 충분하다.

정치권의 막말 파문, 농어촌공사 시험문제 유출 등 여기저기 욱하는 언행이 이어지고, 그 부작용 또한 넘쳐난다. 입시 위주의 교육에 찌들어 제대로 된 삶의 자세를 논해보지도 못한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욱하는 사회를 통해 얼마나 불량한 가르침이라도 주려는 것인지 심히 염려스럽다.

가정과 학교 교육을 통해, 사회를 통해 감각적인 욕망을 억제하는 자제력을 습득해야 하지만 욕망의 달성을 위해 강력히 전진할 것을 주문하는 가정과 학교에서 이러한 배움의 기회를 갖기는 어렵고, 사회마저도 청소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는커녕 욱하는 모습만 보여 줄 따름이니 청소년들이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가.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 세계 1위며, 수년째 1위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도 자살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분명한 진단은 어려우나 청소년들이 위기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고, 쉽게 자살을 택하는 현실은 분명 위기며, 이 참담한 현실에 작든 크든 원인을 제공한 것 또한 분명하므로 욱하는 사회는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철도노조의 파업 사태도 욱하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해 아쉬움이 남는다. 파업에 들어가자마자 8000여 명의 노조원을 직위해제 해버린다. 불법 파업에 대한 엄정한 대처라고는 하지만 노사문제는 대화를 통해 풀어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대책이므로 좀 더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답을 찾은 뒤였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벌이 목표가 아니지 않은가.

노조도 파업에 앞서 문제해결을 위한 대화에 얼마나 적극적이었을까 궁금하다. 대통령까지 나서 민영화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으면 이제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려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파업이 목적이 아니지 않은가.

국민은 열차 운행이 줄어드는 등 파업으로 인해 겪는 불편 때문에 우려의 시각을 보내기도 하지만 대화와 타협을 모르는, 노사의 욱하는 듯한 감정적 대응이 더 염려스럽다.

민주화된 사회 속에서는 노사분쟁은 노와 사가 존재하는 한 불가피한 과정일 수 있으며, 대화와 타협 등 해결에 이르는 그 과정 또한 청소년들에게는 교육적일 수 있다. 문제는 노사 간의 분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해결되는가 하는 것이다. 목적을 상실한 듯한 노와 사의 파업과 강경대응은 그저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격한 마음만 드러내는 욱함으로 비쳐질 수 있다.

욱하는 사회의 결말은 자명하다. 욱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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