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소녀와 한 소년에 대한 먹먹한 소회

이인회
사회부장

“가난은 죄가 아닙니다. 다만 불편할 따름입니다.”

아직은 개천에서 용이 나던 1980년 대 초반 무렵으로 기억된다. 학력고사 전국 수석으로 졸지에 찬하의 대상이 된 수험생이 해비(賅備)하지 못한, 아니 남루하기 짝이 없는 환경을 빗대 한껏 치켜세우는 언론에 어기차게 답했다. 한 동안은 그렇게 믿었다. 풍파에 찌든 것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죄라는 생각이 요즘 부쩍 자주 든다. 불편한 것은 당연지사. 없이 사는 사람들이 죄인 취급받기 일쑤니 어찌 불편할 따름이라고 자위할 수 있겠는가. 행복의 기준을 논하는 이상주의자들의 위로는 결코 가난한 살갗조차 어루만질 수 없는 법이다.

지난달 아내와 잠시 캄보디아 씨엠립엘 다녀왔다. 가고 싶었던 곳에서의 며칠간 휴식이 퍽 인상 깊었다. 또 하나 여운이 가시지 않는 잔상은 지금도 턱을 괴게 한다.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원 달러’의 스펙트럼이 그렇다. 누구는 이런 저런 기념품을 사달라고 애원했고 누구는 그저 구걸했다. 공정가는 원 달러. 마냥 가여워 여기다가는 당해낼 재간이 없는 지경을 얍삽한 시선 회피로 모면하면서 뒷골이 심하게 당겼다. 특히 두 소녀, 한 소년과의 짧은 조우는 가슴 한 구석을 먹먹하게 만든다.

“저 아이 마음에 걸리네요.”

앞 다퉈 엽서를 사 달라는 꼬마들의 웅성거림을 애써 외면한 채 허물어져가는 한 사원을 감상하던 터라 아내의 귀엣말을 귀담지 못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들은 그 내막에 “자세히 얘기 해주질 그랬느냐”고 공연히 애먼 아내를 지청구했다. 여느 아이들이 엽서를 내밀며 원 달러 흥정을 붙여올 때 그 소녀는 사원 한 구석에서 엽서를 수북이 쌓아놓은 채 공부를 하더라는 것이다. 구걸하듯 엽서를 파는 게 싫었든지,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든지 둘 중 하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순간 뒤엉키며 가뜩이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후볐다.

사람 손으로 팠다는 호수에서는 일행 중 한 어르신을 신작로 안쪽으로 안내하다 그만 내 왼손이 실 팔찌를 사달라며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던 여자아이의 얼굴에 부딪쳤다. 어찌나 놀랐는지 나도 모르게 우리말로 “괜찮냐”고 물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더 어리벙벙한 것은 후속조치였다. 알량한 원 달러를 내밀며 실 팔찌를 산 뒤 다시 돌려주지 않았는가. 손짓 몸짓으로 거듭 안위를 묻는 내게 소녀는 환하게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줬다. 심장이 아렸다.

킬링필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사원에선 몸이 불편해 보이는 한 소년이 수줍은 표정으로 우리를 주시했다. 가이드가 그 소년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호기심이 나냈다. 가이드 말하길 소아마비와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소년은 부모 없이 동가식서가숙하는데 자신이 언제 사원에 오는지 알고 때마다 기다린다고 했다. 그러면 2000리엘(한화 약 500원)을 손에 쥐어준단다. 원 달러(4000리엘)가 아닌 게 의아해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 또 짠했다. 첫 대면에 소년은 2000리엘을 청했고 원 달러를 주자 다음 대면에 2000리엘을 돌려주더라는 것이다.

캄보디아는 국민 소득은 낮지만 행복지수가 우리보다 훨씬 높은 나라다. 삶의 방식이 다른데 소득 수준이 낮다는 외견만 훑어 얕잡는 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문제는 사회 보호막이 아닌가 싶다. 지뢰를 밟은 상이군경을 보듬는 손, 아픈 아이들을 치료해 주는 손, 원 달러를 벌어 가족의 생계에 일익을 담당하는 고사리 손을 잡아주는 손이 태부족인 것 등을 두고 ‘행복한 국민’ 일각에서 30년 가까운 독재로 고인 정치를 탓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니 불편하긴 한 모양이다. 국민들이 못 살아도 행복하다는 것은 상대적 가치를 반영한 지수가 아닐까. 가난의 질이 다를지언정 우리 주변에 ‘두 소녀와 한 소년’이 적잖다고 보면 우리 정치도 그리 내세울 것은 없어 보인다. 가난을 단죄하는 사회가 아니라 구조적인 모순으로 가난이 대물림되는 현상을 부끄러워하는 ‘행복한 나라’의 국민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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