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국 본사 상무/총괄국장

한 세월호 희생자 가족은 ‘잊혀질까 두렵다.’는 말을 남겼다. 수많은 목숨을 잃는 대형사고를 당하면 당장은 호들갑을 떨며 대책 마련에 분주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유야무야 일상으로 돌아가버리고, 여전히 불안전한 사회는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비정상을 이어가는 모순에 대한 염려였다. 또한 어른들의 탐욕과 무능이 빚어낸 이 대참사를 잊지 말고, 다시는 이런 인재(人災)가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적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라는 주문이기도 했다.

그 당시 눈물로 얼룩진 사회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 학생들을 포함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낸 대참사를 ‘누가 잊을 수 있겠느냐?’였다. 그러나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던 세월호의 참사는 점점 잊히고 있는 듯하다. 희생자의 시신에 묻은 물기가 채 마르지도 않은 것 같고, 아직도 16명의 실종자를 찾아 헤매는 이 고통의 순간에 말이다.

가라앉은 사회 분위기로 소비가 지나치게 위축되면서 어렵게 회복기에 접어들던 경제가 다시 침몰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어쩔 수 없이 일상으로 돌아가 생활에 충실해야만 하는 산자의 몫을 헤아린다면 당연히 세월호 참사의 충격에 장기간 함몰돼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단순히 일상으로의 회귀 과정에서 나타나는 세월 속의 망각을 우려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정부의 초점을 잃은 듯한 대책에서, 표심을 향한 정치권의 아전인수식 활용에서, 국민의 기억 지우기에서 출발한다.
해양경찰청이 해체되는 등 박근혜 대통령의 작심 결정에 따라 정부 조직 개편이 진행되면서 속속 대책이 등장하고 있다. 흐리멍덩하게 세월만 보내다가 또다시 국민을 죽음으로 내모는 사고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고 보면 어떤 결정이든 기꺼이 수용하고 볼 일이다.

그러나 기구개편 등 지나치게 외형적 대책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과적과 불법구조변경을 차단할 법이 없고, 관리 감독할 공무원이 없어서 세월호가 과적을 하고, 불법구조변경을 한 것이 아니다. 서서히 기울며 침몰하는 배 속의 승객을 구조할 해양경찰이 없어서 목숨을 잃은 것도 아니다. 승객을 버린 승무원을 처벌하는 형량이 약해서 선장과 승무원이 승객을 버리고 달아난 것도 아니다.

기구 통폐합과 신설 등 외형적 논의보다는 운용을 담보할 수 있는 내적 시스템의 구축이 더욱 절실한데도 조직 개편을 둘러싼 갑론을박만이 분주하다. 왜 이런 사고가 발생했는지, 얼마나 많은 목숨을 잃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이미 희미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이유이다.

통폐합 조직 구성원의 반론 표출 또한 마찬가지다. 설득력 있는 반론도 있지만 더 이상 국가의 무능함으로 인해 국민이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장치를 마련하는 이 시점에 조직의 존폐에 따른 사기 저하 거론은 기득권 지키기로 비칠 뿐이다.

6·4 지방선거 선거전 속으로 끌려들어간 ‘세월호 참사’ 또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현 정부, 지난 정부 할 것 없이 정치권 누구도 이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누가 누구를 비난하고, 세월호를 득표전략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이미 기억에서 지워버린 것이 아니라면 합리적 대안을 위한 여야의 협력만이 국민과 희생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길이다.

국민의 의지도 문제다. 세월과 함께하는 자연스러운 기억의 소멸이어도 아쉬운 마당에 굳이 기억에서 떨쳐내려 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누군가 다른 목적에서 활용해 거부감이 생긴다 해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건이기에 잊어버리려는 의도적 노력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른들의 탐욕과 무능함이 초래한 ‘4.16 세월호 참사’는 세월에 맞서서라도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 억울하게 죽은 어린 영혼에 대한 위로와 더불어 더 이상의 재발 방지가 가능하다. ‘4.16 세월호 참사’는 절대 잊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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