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이인회 사회부장

지하철에서
조금 늦은 저녁, 술 몇 잔 기울이고 지하철을 탔다. 취객의 체취가 얼마나 비위에 거슬리는 지 익히 아는 처지라 불콰한 얼굴을 하고선 객차 한 구석에 얌전히 섰다. 좌석을 꽉 채우고 일부 승객들이 진동에 맞춰 잦바듬하게 서 있는 정도의 한갓진 지하철 속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귀소(歸巢)의 노곤함이 짙게 깔린 듯 침묵만 는적인다고 착각할 즈음 누구랄 것도 없이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눈은 손바닥을 뚫어져라 주시하는 군상을 목격했다.

이 쪽으로 봐도 그 장면이고 저 쪽으로 봐도 그 장면이다. 혹시나 싶어 옆 칸을 바라봐도 똑같았다. 젊은이도, 늙은이도 사람이라고는 죄다 그랬다. 순간 앙칼지게 호흡하며 달리는 지하철에서 나만 숨 쉬고 있는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했다. 지하철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남과 말을 섞을 계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할 일이 있어 손을 놀려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마치 플래시몹이라도 하듯 똑같은 행위를 하는 데는 삭막함을 넘어 냉기마저 엄습했다. 차라리 예의범절 따위엔 관심 없다는 식으로 떠드는 무리가 섞여 있거나 ‘사장님이 미처 땡 처리 한다’는 잡상인이라도 나서 그 기계적인 정적을 깨 주길 바랐다.

지하철을 지옥철이라고 타박하면서도 달리 거부할 수 있는 방도가 없던 시절, 하루 왕복 1∼2시간은 심하게 부대끼는 순간이 싫었어도 책 읽기에 더 없이 좋은 자투리 시간이었고 같은 방향 친구들과 나지막이 시대를 공유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공간이 바뀌었다 해도 대전 지하철엔 책장을 넘기는 사각소리 가뭇없고 소곤소곤 대화 한 자락 들리지 않는다.

최첨단 기술의 총아라는 스마트폰 제작자들을 떠올리며 ‘똑똑한 사람들이 상술에 함몰돼 참 몹쓸 짓을 해대는 구나’고 타박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자고 일어나면 신제품이라고 쏟아내는 신통방통 문명의 이기가 세상과 갑남을녀를 물아일체로 손바닥에 가둬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어떻게 인식할까하는 오지랖 말이다.

거리에서
술기운에 감상이 과했나보다 상황을 눙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다. 한 청년이 겨우 교행이 가능한 좁디좁은 아파트 쪽문에 선 채 행인들의 보행을 가로막았다. 좀 비켜 달라는 요청을 듣지 못한 청년의 귀엔 이어폰이, 손바닥엔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하긴 횡단보도는 양반이고 무단 횡단을 하면서도 눈은 스마트폰에 고정시키는 용감한 이들이 어디 한 둘인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엘리베이터나 지하철 입구를 떡 하니 막고 꿈쩍하지 않는 청춘들도 부지기수다.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들입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다시 지하철에서
대전도시철도공사가 최근 의미 있는 동행을 제안하고 실천해 눈길을 끌었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의 독서 권장 플래시몹이 그것이다. 지난 16일 한밭대학교 독서토론 동아리를 주축으로 대전지역 대학생 30여명이 이 플래시몹에 참여했다. 독서하는 승객들에게 영화시사회권과 초콜릿 등을 선물했다고 하는데 과연 몇 명이나 달콤한 선물을 받았는지 알아보지는 않았다. 대전지역의 독서량과 시간, 공공도서관 이용률이 낮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독서환경 조성 프로그램이 삭막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해 주길 바란다면 첫 술을 너무 크게 측량한 오판일 게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무엇을 하든 자유다. 쪽잠을 잘 수도, 수다를 떨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사색을 할 수도, 멍하니 시간을 때울 수도 있을 일이다. 취미 없는 사람에게 책 읽기를 강요하는 것은 오만방자한 아집이다. 다 양보해도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그림처럼 남녀노소 스마트폰만 바라보는 장면이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공포로 다가오는 건 아날로그 인간의 한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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