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국 상무/편집국장

내일은 광복 70주년에 맞는 현충일이다. 선대나 가족 중에 국가유공자가 없어 그리 부산한 현충일 행사를 접하지는 못했으나 가볍기는 하지만 허벅지에 관통상의 상흔이 남아 있던 6.25 참전 용사인 선친의 과거 무용담 덕분에 으레 현충일은 휴일의 들뜬 마음보다는 경건함이 배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광복 70주년의 현충일을 맞으며, 그 의미가 더욱 새로운 것은 단지 선친이 던진 그 분위기의 확대만은 아니다. 요즘처럼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와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라 할 수 있는 뜨거운 ‘공무원연금 논쟁’, 큰 의미의 국민적 ‘복지논쟁’ 의 열기 속에 머무름에 따른 것이다.

현충원에 안장된 국가유공자를 비롯,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공통점은 아낌없이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 분들이다. 가산은 물론, 기꺼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내던진 그들의 애국애족 정신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정신이며, 자세이다.

항일의 기록이 분명한 선열은 일찍이 역사 교과서를 통해 우리에게 소개됐고, 뒤늦게나마 가려져 있던 그 헌신들도 후손과 정부 차원의 갖은 노력으로 인해 빛을 보게 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아직도 기록의 부재나 후손의 단절 등으로 인해 국가의 보훈에서 소외된 애국지사와 그 후손도 많으며, 친일파와 달리 가산을 탕진한 그들의 후손은 생활고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보상이란 것도 후손의 마땅한 예의이자 애국지사에 대한 국가적 보훈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그 누구도 조국의 독립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던 순수한 희생이었다.

기억하는 이도 드문 1920년 경신참변(庚申慘變)의 대학살에 스러져간 선열의 희생도 그러했다.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의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는 일본군을 패퇴시키며, 우리 민족의 억눌린 가슴을 시원히 뚫어주는 쾌거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화려한 대승은 일본군의 잔인한 대학살, 경신참변(간도참변, 경신간도학살)으로 이어졌다.

당시 만주 일대의 독립군은 무기는 물론 군량미가 없어 대일 투쟁에 여간 어려움을 겪은 것이 아니다. 이때 만주 지역에 화전을 일구며 어렵게 정착한 우리 민족은 독립군의 항일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허리끈을 더욱 세게 조르며 그들에게 군량미를 지원했다.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과 광복을 위해 싸우는 독립투사의 주린 배를 채우려는 동포애의 발로에서 출발한 자발적 희생이었다.

그냥 지나칠 일본군이 아니었다. 독립군에게 패한 일본군은 만주 일대의 한국인에 대한 잔혹한 보복 살인을 자행했다. 마치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보여주려는 듯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악랄한 방법을 동원해 잔혹한 집단 살육을 저질렀다.

마을이란 마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으며, 그 죽음은 살육 27일 만에 3469명이라고 하니, 3~4개월 동안 학살된 인원은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그 참혹상은 ‘피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개탄한 미국 선교사의 수기를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어떤 보답도 염두에 두지 않은 이들의 희생 앞에서, 복지 논쟁이 뜨거운 현실을 마주하니 그저 송구스럽다는 생각이 앞선다. 세금 부담은 후진국처럼 적게, 복지는 선진국처럼 아주 많이 받으려 하는 무모한 논쟁이다 보니 해결책 찾기가 너무나 벅찬 모습이다.

부담에는 인색하면서도 복지 혜택에는 목소리를 높이는 오늘 우리의 복지논쟁이 광복 70주년 호국보훈의 달 6월의 오늘에 녹아드니 우리의 모습이 아주 초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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