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이사/총괄국장 이 영 호

예나 지금이나 전염병은 공포의 대상이다. 그 중 흑사병은 인류에게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1347년부터 1351년까지 3년간 서유럽을 휩쓴 흑사병으로 2500만 명에 가까운 인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로 인해 1400년 영국의 인구는 1300년의 절반으로 감소한 것으로 기록돼 있고 서유럽의 인구는 16세기가 돼서야 1348년 수준으로 회복했다고 한다. 흑사병의 맹위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흑사병은 또 1664년 런던에서 크게 유행해 7만 명이 사망했고 1894년에는 중국 남부 등 일부 지역에서 유행해 10만 명이 사망했다. 이후 20년간 전 세계로 퍼져 나가 10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흑사병으로 인한 사망자를 7500만 명으로 보는 학자도 있을 만큼 흑사병은 인류에게 최악의 전염병으로 남아있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 대한민국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메르스는 지난달 20일 중동을 여행하고 돌아온 60대 남성에 의해 국내에 유입됐고 고열, 기침, 호흡곤란, 설사 등이 주요 증상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국민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치사율이 40%에 달하지만 전염력이 높지 않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자발생 20여일 만에 메르스가 생활을 바꿔 놨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정치이슈는 함몰돼 온데간데없고 유동인구가 줄면서 유통업체는 개점휴업상태다. 해외에서는 여행자제국으로 낙인찍히면서 외국인들의 여행 취소가 잇따르고 있다. 또 프로야구를 비롯한 스포츠는 관중이 대폭 줄었고 각종 공연은 환불사태로 적자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물론 공연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전염성이 높지 않다고 연일 강조하고 있지만 자고나면 십여 명씩 환자가 늘어나고 사망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면서 불안심리가 극에 달하고 있다. 국민들은 미숙한 초기대응과 환자발생 병원 미공개에 분노하고 있다. 정부는 첫 환자가 발생한 후 격리조치를 소홀히 하는 등 철저한 확산방지대책을 세우지 않고 안이하게 대처했다. 일반 환자와 같은 병실을 사용토록 하고 의료진도 무방비로 노출됐다. 성공적으로 방역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게다가 메르스 환자발생 병원을 비밀에 부쳤다. 이미 SNS와 인터넷 등을 통해 공공연한 비밀이 됐는데도 정부는 상당기간동안 공식발표를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무방비로 메르스 바이러스에 노출된 국민이 늘어났고 환자로 확진판정을 받았다. 환자발생 병원만 공개했더라도 방문취소 등으로 의심환자나 확진자를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충분히 막을 방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기를 놓친데 대한 분노다.

세월호 사태 이후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재난대응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축해 즉각적이고 치밀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혀 왔으나 이번 사태로 보면 전혀 변한 게 없다. 지난해 4월과 마찬 가지로 우왕좌왕하고 있고 곳곳에서 구멍이 생기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문제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면서 정부를 믿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국민이 믿게 하면 믿어달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믿을 수 있게 행동하지 않으면서 믿어달라는 말만 하면 누가 믿고 따르겠는가. 믿을 수 없는 정부가 되고 말았다.

어쩌면 메르스 확산으로 가장 크게 잃은 것은 국민의 신뢰일 것이다. 세월호 이후 조금씩 회복돼 온 신뢰가 또다시 곤두박질치고 있다. 사후약방문이라도 제대로 해야 신뢰 회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스방역 모범국가였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