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국 편집국장/상무이사

인간만이 가진 이성(理性). 이성은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며, 진위(眞僞)와 선악(善惡)을 식별하고,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인간은 때로는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거나 짐승보다 못한 행동을 일삼아 인간을 놀라게 한다.

인간의 이성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은 감정이다. 인간은 공포, 불안, 물욕 앞에 서면 쉽게 감정을 드러내고 만다. 감정이 이성을 누르고, 이성을 앞서게 되면 인간은 짐승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어느 순간 감정이 이성을 앞서더라도 이성이 있어 인간은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을 동원, 인간다운 면모를 잃지 않는다. 하지만 흔히 이성과 감정 사이의 줄타기에서 이쪽저쪽을 오가며, 언제든 감정을 앞세울 준비를 하는 이중적 인간은 부지기수다.

비이성적 인간의 면모를 보여주려는 듯 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의 등장 앞에 많은 사람들은 감정적 대응을 잊지 않았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은 그 공포심이 배가되기 십상인지라 메르스 등장과 더불어 보여준 사람들의 다양한 대응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감정을 앞세운 비이성적 대응을 몸소 당하고, 경험해야 했던 상대에게는 공포 그 이상일 수 있어 이성적 판단이 앞서야 했다.

공기로 인한 감염은 불가능하며, 비말과 접촉에 의해서만 감염이 된다는 발표를 믿지 못해 일체 외출도 삼가는 등의 과잉 대응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며, 취향 또는 개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의료진의 자녀들이 학교나 유치원에 등교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은 것은 비이성적, 감정적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영문도 모른 채 교사 또는 학부모들로부터 친구들과 강제로 격리 당한 그 어린 아이들이 받은 심리적 충격은 예사롭게 판단할 사안이 아니다. 또한 가족과 이별한 채 격리된 병원에서 목숨을 걸고 환자를 치료하던, 감사해야 할 의료진에 대한 예의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렇게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메르스보다 훨씬 더 무서운 죽음의 공포가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데도 어떻게 이리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지 무척 궁금하다. 우리가 익숙한 것인 양 아무렇지 않게 지내왔던 주변의 공포를 떠올려 보면 좀 부끄러운 생각이 앞선다.

지난 5월 20일 메르스가 발병한 이후 50일이 지났다. 지금까지 사망자 수는 35명이다. 하루 평균 0.7명이 사망한 셈이다. 분명 적지 않은 숫자며, 적절한 대처가 함께했다면 줄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많이 안타깝다.

그러나 교통사고 사망자를 살펴보자. 지난해 기준 4762명이 사망, 하루 평균 13명이 죽었다. 메르스의 18.5배다. 결핵으로 매년 2천여 명이 사망한다. 하루에 6명꼴로 죽는다. 공기 중 감염이 되므로 메르스보다 심각할 수 있지만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부 대처조차 밋밋하다. 계절성 독감으로도 매년 2천여 명이 사망한다. 하루에만 6명꼴로 죽는다. 메르스에 비할 바가 아니다.

너무나 심각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전국민이 너무나 무감각하게 지나쳐 버리며, 평온하게 관망만 하고 있다. ‘나는 예외일 것’이란 무모한 기대 때문일까. 이성이 감정을 잘 눌러주었기 때문일까, 감정이 이성을 꾹 누르고 있기 때문일까.

메르스보다 훨씬 빨리, 더 많이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교통사고, 결핵 등에 좀 더 이성적으로 대응해야 하지 않을까. 각 분야에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대책 마련을 강력 촉구하고, 내가 솔선수범해 사고예방과 감염예방에 앞장서는 등의 이성적 대응이 함께한다면 사망자는 대폭 줄어들 것이며, 나와 내 가족의 안전도 담보할 수 있다.

하늘이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부여한 이성을 전쟁, 살육 등을 일삼으며 가장 짐승스럽게 사용하는 것이 인간이라지만 우리는 이성을 지녔기에 우리를 인간이라 부른다. 언제든 이성을 소유한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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